유동성 (Liquidity)

"돈이 잘 흐르는 정도." 같은 단어가 세 가지 다른 것을 가리키는, 가장 헷갈리는 개념. 그리고 그 세 개가 위기 때 어떻게 서로를 끌어내리는지.

1. 같은 단어, 세 가지 다른 것

1.1 유동성의 세 정의

한 줄 요약
"유동성"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하나의 의미로 쓰이지만, 금융에서는 층위가 다른 세 개념을 가리킨다. 자산 유동성(개별 자산의 환금성), 시장 유동성(시장 전체에서 큰 거래의 가능성), 자금조달 유동성(주체가 필요할 때 돈을 빌릴 수 있는가). 평시에는 세 개가 같이 움직여서 한 단어로 묶여도 큰 문제가 없지만, 위기 때는 셋이 서로를 끌어내리며 별개의 변수로 분리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3월 코로나 충격 — 두 시기 모두 "유동성 위기"라고 부르지만, 같은 단어 안에는 세 층위의 붕괴가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그 셋을 분리해야 위기의 메커니즘이 보이고, 중앙은행이 어떤 도구로 어디를 때리는지가 이해된다.

유동성대상질문대표 측정
① 자산 유동성
(Asset Liquidity)
개별 자산 이 자산을 얼마나 빨리·손실 없이 현금화할 수 있는가? 현금화 시간, 헤어컷
② 시장 유동성
(Market Liquidity)
시장 전체 이 시장에서 큰 물량을 가격 충격 없이 사고팔 수 있는가? 매수–매도 스프레드, 시장 깊이, 회전율
③ 자금조달 유동성
(Funding Liquidity)
경제 주체(은행·기업·가계) 이 주체가 만기 도래·인출 요구에 대응할 돈을 조달할 수 있는가? LCR, NSFR, 만기 갭

세 유동성을 한 그림으로

① 자산 유동성 대상: 개별 자산 "현금화 가능한가?" 현금 > 국채 > 우량회사채 > 부동산 > ... ② 시장 유동성 대상: 시장 전체 "가격 충격 없이 거래?" 매수–매도 스프레드 시장 깊이 · 회전율 ③ 자금조달 유동성 대상: 경제 주체 "돈을 빌릴 수 있는가?" LCR · NSFR 만기 갭 · 신용 한도 평시 — 세 개는 약하게 연결, 거의 독립 위기 시 — 셋이 서로를 끌어내리는 양성 피드백 고리 자산가치 ↓ (headcut ↑) 시장 마름 (스프레드 ↑) 자금조달 끊김 (롤오버 실패) 매도 강요 → 자산 가격 더 추락
평시에는 세 유동성이 거의 독립이라 한 단어로 묶어도 무방하지만, 위기 때는 세 개가 양성 피드백 고리를 형성한다. 6장에서 이 고리를 분해한다.

1.2 물리적 비유 — 점성·압력·저장량

관점
유체역학의 세 변수에 대응시키면 직관이 잡힌다. 자산 유동성 ↔ 점성의 역수(개별 입자가 얼마나 잘 흐르는가), 시장 유동성 ↔ 단면적(파이프가 얼마나 넓은가), 자금조달 유동성 ↔ 압력·저장량(상류에 충분한 물이 있는가). 평시에는 모든 변수가 충분히 크기 때문에 흐름 방정식이 잘 작동하지만, 어느 하나가 임계점 아래로 떨어지면 다른 둘도 같이 무너진다.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본원통화를 외부 펌프로 주입한다고 모든 흐름이 즉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는 점이다 — 펌프 출력(중앙은행 본원통화)이 아무리 강해도 파이프(시장 인프라·딜러 대차대조표)가 막혀 있으면 하류는 마른다. 5장에서 다시 본다.

2. 자산 유동성 (Asset Liquidity)

2.1 정의와 위계

정의
한 자산을 큰 가치 손실 없이 빠르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정도. 두 차원이 있다 — 속도(언제까지 현금화되나)와 가치 보존(현재가 대비 얼마나 깎이나).

자산은 유동성 위계(liquidity hierarchy)에 따라 줄을 세울 수 있다. 안쪽으로 갈수록 "곧 현금에 가까운 것".

부동산·사모펀드·미술품 등 (현금화에 수개월~수년) 회사채 · 주식 (T+2 결제, 시장 가격에 즉시 환금) 우량 국채 · MBS (T+1, 거의 액면) 지급준비금 · MMF 즉시 결제 현금 ← 유동성 ↑ 유동성 ↓ →
안쪽으로 갈수록 환금 속도가 빠르고, 시세 대비 손실이 적다. 이 위계의 안쪽 절반(현금~우량 국채)을 고유동성 자산(HQLA, High-Quality Liquid Assets)이라 부르며, 상업은행의 LCR 규제는 이 범주의 양을 강제한다.

2.2 헤어컷(Haircut)과 담보가치

자산 유동성을 정량화하는 한 가지 방식은 헤어컷이다 — 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빌릴 때, 시가의 몇 %를 깎고 빌려주는가.

$$\text{대출 가능 금액} = \text{시가} \times (1 - \text{헤어컷})$$

평시 미 국채의 헤어컷은 보통 1~3% 수준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 일부 MBS의 헤어컷은 0%(=담보로 거의 안 받음)까지 치솟았다. 같은 자산이 위기 때 갑자기 다른 자산이 되는 메커니즘이 바로 헤어컷의 변동이다.

예시 — 헤어컷이 자기실현적으로 자산 유동성을 죽인다
  • 평시: 100억의 MBS를 담보로 95억 차입 (헤어컷 5%)
  • 위기 시: 같은 MBS를 담보로 80억밖에 못 빌림 (헤어컷 20%)
  • 이미 95억을 빌려놓은 차주는 15억의 추가 현금을 어디선가 마련해야 함 → MBS 매도 강요
  • 매도 압력은 시가를 더 떨어뜨림 → 헤어컷이 또 오름

자산 유동성과 시장 유동성과 자금조달 유동성이 한 단계 안에서 동시에 악화된다. 이것이 6장에서 보는 "세 유동성의 악화 고리"의 단일 단면이다.

3. 시장 유동성 (Market Liquidity)

3.1 정의 — "가격에 큰 영향 없이 거래 가능"

정의
시장에서 큰 거래량을 처리해도 시장 가격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 정도. 자산 유동성이 "이 자산을 팔 수 있나"라면, 시장 유동성은 "이 시장에서 큰 물량을 팔 때 가격이 얼마나 무너지나"다.

같은 자산이라도 시장 유동성은 시기와 시장에 따라 다르다. 미 국채의 자산 유동성은 항상 매우 높지만, 미 국채 시장의 시장 유동성은 2020년 3월 며칠간 무너졌다 — 자산은 그대로였는데 시장이 못 받아들였기 때문이다(7.2절).

3.2 측정 지표 4가지

시장 유동성은 단일 숫자가 아니라 네 가지 지표로 측정한다.

지표측정 대상해석위기 시 변동
매수–매도 스프레드
(Bid-Ask Spread)
거래 비용 최고 매수호가와 최저 매도호가의 차이. 좁을수록 유동성 ↑ 위기 시 수 배~수십 배로 확대
시장 깊이
(Market Depth)
가격 충격 현재 가격대 근처에 쌓인 주문량. 깊을수록 큰 거래에도 가격이 덜 움직임 위기 시 호가창이 얇아짐
회전율
(Turnover)
거래 활성도 일평균 거래량 / 발행잔액. 높을수록 매수·매도 상대 찾기 쉬움 위기 시 거래 멈춤 → 회전율 추락
가격 영향(λ)
(Kyle's lambda)
가격 탄력성 거래량 1단위가 가격을 얼마나 움직이는가의 추정치 위기 시 λ가 급격히 상승

매수–매도 스프레드 — 가장 직관적인 한 줄 지표

평시 호가창 (얇은 스프레드) 매도 100.04 120억 매도 100.03 180억 매도 100.02 250억 스프레드 0.02 매수 100.00 240억 매수 99.99 190억 매수 99.98 220억 → 큰 주문도 가격 충격 작음 위기 호가창 (넓은 스프레드 · 얕음) 매도 100.20 15억 매도 100.12 25억 스프레드 0.18 (9배) 매수 99.94 18억 매수 99.85 28억 → 100억 매도하려면 시가 충격 큼
같은 자산, 같은 발행잔액인데 시장 유동성은 호가창의 모양에 따라 다르다. 위기 때 스프레드가 벌어지고 호가가 얇아진다 — 이 둘은 사실상 같은 현상의 두 측면이다.

3.3 시장조성자(Market Maker)의 역할

시장 유동성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시장조성자(딜러·프라이머리딜러·헤지펀드 일부)가 자기 대차대조표에 재고를 쌓아두고 매수–매도 양방향 호가를 동시에 내기 때문에, 일반 참여자는 즉시 거래할 상대를 찾을 수 있다.

시장조성자 재고 보유 · 양방향 호가 이익 = 스프레드 × 회전 제약: 자기자본 · 한도 매도 의지자 "채권을 팔고 현금" 매수 의지자 "현금을 채권으로" 채권 매수가 채권 매도가 두 참가자는 만나지 않는다 — 시장조성자가 시간차를 흡수한다 (자기 재고로)
시장 유동성의 본질은 "거래 상대를 즉시 찾는 능력"이고, 시장조성자가 자기 재고로 그 시간차를 흡수해 준다. 따라서 시장 유동성은 시장조성자 대차대조표의 함수다 — 위기 때 딜러가 한도가 차거나 위험회피로 호가를 거두면 시장이 마른다.

4. 자금조달 유동성 (Funding Liquidity)

4.1 정의 — "필요할 때 돈을 빌릴 수 있는가"

정의
주체(은행·기업·헤지펀드·가계)가 만기 도래 채무 상환·예금 인출 요구·증거금 납입 등의 자금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정도. 앞의 두 유동성이 "자산 쪽" 이야기라면, 이것은 "부채 쪽" 이야기다 — 부채를 갈아끼우거나 새로 차입할 수 있는가.

전형적인 은행의 만기 구조를 보면 자금조달 유동성이 왜 본질적으로 취약한지 보인다.

자산 — 장기 기업 대출 (3~7년) 주담대 (20~30년) 국채·회사채 (1~10년) 지준·현금 부채 — 단기 요구불 예금 (즉시 인출 가능) 정기예금 (1~12개월) CD · 단기차입 (overnight~3개월) 자본 (장기) 자산은 길고 부채는 짧다 — 만기변환(maturity transformation)이 은행 본업이자 위험원
은행의 본질은 "단기로 빌려서 장기로 빌려준다"는 만기변환이다. 평시에는 단기 부채를 계속 갈아끼우며(롤오버) 작동하지만, 롤오버가 끊기는 순간 자금조달 유동성 위기가 시작된다 — 1907·1929·2008년 위기 패턴.

4.2 측정 — LCR · NSFR · 만기 갭

2008년 이후 바젤III가 도입한 두 가지 자금조달 유동성 규제 지표가 사실상 표준이다.

$$\text{LCR (Liquidity Coverage Ratio)} = \frac{\text{고유동성 자산 (HQLA)}}{\text{30일 순현금유출 예상치}} \geq 100\%$$

LCR은 단기 시나리오(30일) 대응력을 본다 — "30일 동안 예금 인출과 채무 상환이 몰려도, 보유한 고유동성 자산을 팔아 버틸 수 있는가." 분자는 자산 유동성 위계의 안쪽(현금·지준·국채 등 HQLA)이 차지하고, 분모는 위기 시나리오에서의 인출률 가정으로 계산한다.

$$\text{NSFR (Net Stable Funding Ratio)} = \frac{\text{가용 안정 자금조달}}{\text{필요 안정 자금조달}} \geq 100\%$$

NSFR은 더 긴 시평(1년) — "장기 자산(주담대·기업대출)을 충분히 장기 자금(자본·정기예금·장기 채권)으로 받쳐주는가." 만기 갭의 1년 버전이다.

지표시평본질도입
LCR 30일 충격 흡수 — 위기 시 한 달은 버텨라 바젤III, 2015~
NSFR 1년 구조 안정 — 장기 자산은 장기 자금으로 바젤III, 2018~
만기 갭(Maturity Gap) 가변 각 만기 구간별 자산–부채 차이 전통적 ALM 지표

이 두 규제가 도입된 결정적 이유는 2008년 위기였다 — 자본은 충분했던 은행들도 (자본 규제는 통과) 자금조달이 끊겨 무너졌다. 자본 ≠ 유동성이라는 사실이 규제 체계에 명시적으로 반영된 결과가 LCR·NSFR이다.

5. 중앙은행 유동성 vs 시장 유동성

5.1 본원통화가 늘어도 시장은 마를 수 있다

가장 흔한 오해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푼다 = 시장에 돈이 도는 정도가 늘어난다." 이 동일시는 위기 때 거의 항상 틀린다. 본원통화(M0)는 상업은행의 지준 잔액으로 거의 다 흡수되며, 그 자체로 채권 시장의 매수–매도 호가창을 두껍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2008년·2020년 모두 QE로 본원통화가 폭증한 와중에도 채권시장 스프레드는 동시에 벌어졌다.

이 분리를 이해하려면 두 유동성의 정의가 다르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야 한다.

전자가 늘어도 후자가 늘어나려면 그 사이의 파이프(딜러 대차대조표 여력, 위험회피, 규제 한도)가 살아 있어야 한다.

5.2 막힌 파이프 비유

중앙은행 QE · 자산 매입 본원통화 ↑↑ 상업은행 지준 잔고 보유 대출·시장조성 자기 판단으로 결정 딜러·시장조성자 대차대조표 한도 위험회피 ↑ → 호가 거둠 채권 시장 스프레드 ↑ 지준 ↑↑ 제한적 막힘 파이프의 굵기가 좁아진다 — 본원통화가 아무리 늘어도, 다음 단계에서 막히면 시장 유동성은 회복되지 않는다 2020-03: Fed가 본원통화를 단 며칠 만에 1조 달러 늘렸지만, 미 국채 스프레드는 그 와중에 사상 최대 폭으로 벌어졌다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에 들어가지 않는 한(2020년 3월의 SMCCF·PMCCF처럼), 본원통화 증가는 "시장의 호가창 두께"로 자동 변환되지 않는다. 7.2절에서 자세히.
정책의 함의 — 어디가 막혔는지에 따라 도구가 다르다
  • 은행 자금조달이 막혔다면 → 할인창구·기준금리 인하 (전통 도구)
  • 딜러의 대차대조표가 막혔다면 → 레포 시설, SLR 한시 면제 (2020-03)
  • 특정 시장이 마른다면 → 직접 매입 (PMCCF·SMCCF·MMLF 등)

"유동성 공급"이라는 말 안에 사실 매우 다른 도구들이 들어 있다. 정책수단 페이지에서 도구별로 정리.

6. 유동성 위기 메커니즘

6.1 세 유동성의 상호악화 고리

유동성 위기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세 유동성이 서로를 끌어내리는 양성 피드백 고리다. 한 곳의 충격이 다른 둘로 전파되며 증폭된다.

자산 가치 ↓ 시가 하락 · 헤어컷 ↑ 담보가치 감소 자금조달 막힘 롤오버 실패 · 인출 폭주 현금 확보 강요 시장 유동성 ↓ 매도 압력 → 가격 충격 ↑ 호가창 얇아짐 담보가치 ↓ → margin call 현금 확보 위한 강제 매도 Fire sale → 시가 더 하락 양성 피드백 고리 한 곳을 멈춰야 고리가 멈춘다 — 중앙은행 개입은 보통 가장 약한 고리(자금조달 또는 시장 유동성)에서 들어간다
평시에는 세 노드 사이의 화살표가 약해서 고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위기 임계점을 넘으면 세 화살표 모두가 강해지며 자기증식한다. Brunnermeier & Pedersen (2009)의 "Funding/Market Liquidity Spiral" 모델이 이를 정식화했다.

6.2 Fire Sale

정의 — Fire Sale
강제 매도자가 동시에 같은 자산을 매도하며, 그 자산의 펀더멘털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상. "불난 집에서 가구 던지듯 판다"는 비유.

Fire sale의 핵심은 두 가지다.

이 두 조건이 만나면 가격은 펀더멘털과 분리된다 — 2008년 한때 우량 MBS가 액면 대비 40%에 거래된 것이 대표적이다. 가격이 정보를 반영하지 못하는 구간이 열린다.

6.3 Margin Call 연쇄

레버리지를 쓰는 주체(헤지펀드·증권사 자기매매·일부 ETF)는 담보 비율이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도록 계약돼 있다. 자산 가격이 떨어지면 추가 증거금(margin call)을 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강제 청산.

예시 — 한 차주의 margin call이 전체로 번지는 과정
  1. 헤지펀드 A가 MBS 100억을 담보로 95억을 차입 (LTV 95%)
  2. MBS 시가가 90억으로 하락 → 담보비율 위반 → 5억의 margin call
  3. A는 현금이 없어 MBS 일부를 시장에 매도
  4. 매도가 시장 가격을 더 떨어뜨림 → 다른 차주들도 margin call
  5. 전체 시장이 동시에 매도 압력 → 가격 추가 하락
  6. 딜러도 자기 재고 가치 하락으로 호가를 거둠 → 시장 유동성 증발

개별 차주의 합리적 행동(자기 margin 맞추기)이 전체 시스템에서는 자기파괴적이다 —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의 가장 명료한 사례.

6.4 자기실현적 패닉

자기실현 메커니즘
"이 은행이 망할 것 같다"는 믿음 자체가 예금 인출을 유발하고, 그 인출이 실제로 은행을 망하게 만든다. 펀더멘털이 같아도 믿음의 방향에 따라 두 개의 균형(안정·붕괴)이 모두 가능하다. Diamond–Dybvig(1983) 모형이 이를 게임이론으로 정식화.

자기실현적 패닉이 가능한 이유는 자금조달 유동성의 구조에 있다 — 만기변환을 하는 모든 주체(은행, MMF, REIT, 이머징 마켓 정부 등)는 단기 부채를 매일 갈아끼우며 작동하기 때문에, "다들 안 빌려줄 것 같다"라는 공통 믿음이 형성되는 순간 그것이 사실이 된다.

중앙은행의 최종대부자(LOLR) 기능이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Bagehot(1873)의 원칙대로, 위기 시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약속만 해도 패닉 균형이 사라진다. 실제로 공급하지 않아도 약속 자체가 효과를 낸다는 점이 흥미롭다.

7. 대표 사례

7.1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 자금조달 위기의 표본

2008년 위기는 자금조달 유동성이 먼저 무너지고 그것이 시장·자산 유동성으로 번진 사례다.

시점사건유동성 채널
2007-08 BNP Paribas, ABCP 펀드 환매 중단 ABCP 시장의 자금조달 막힘
2008-03 Bear Stearns 레포 자금조달 끊김 → JPM 인수 증권사 자금조달 유동성
2008-09 Lehman 파산, MMF "buck breaking" (Reserve Primary Fund) MMF 환매 폭주 → 단기금리 폭등
2008-09~10 TED 스프레드 1bp → 460bp 폭등 (은행간 무담보 신뢰 붕괴) 은행간 시장 마름
2008-10~ MBS 시장 fire sale, 일부 우량 MBS 액면 대비 40% 거래 자산 + 시장 유동성 동시 붕괴
2008년의 교훈 — 자본 규제만으로는 부족하다
무너진 은행·증권사들은 대부분 자본 규제(BIS 자기자본비율)를 통과한 상태였다. 그러나 단기 자금조달(레포·CP·ABCP)이 끊기는 순간 며칠 만에 파산했다. 이 경험이 LCR·NSFR 도입의 결정적 동기였다 — "자본은 손실 흡수, 유동성은 시간 흡수".

7.2 2020년 3월 — Dash for Cash

2020년 3월은 매우 다른 종류의 유동성 위기였다. 코로나로 인한 갑작스러운 불확실성 충격이 "모든 자산을 팔고 현금만 들겠다"는 일제 행동을 유발했다. 그 결과 평시 가장 유동성 높던 자산인 미 국채조차 매도 압력에 시장이 무너졌다.

시점사건특이점
2020-03-09 주식·하이일드채 동시 매도 → 일반적인 stress-off 여기까지는 평소 패턴
2020-03-12 미 국채 수익률 곡선 비정상 — 단기·장기 동시 상승 안전자산도 매도됨 = "현금만"
2020-03-13 미 국채 매수–매도 스프레드 정상의 10배로 확대 세계 최유동성 시장 붕괴
2020-03-15 Fed: 금리 0~0.25%, QE 7000억 달러 재개 전통 도구
2020-03-17~ CPFF · PMCCF · SMCCF · MMLF — 직접 시장 매입 시설들 특정 시장에 직접 진입
2020-04~ 본원통화 한 달간 +1.6조 달러, 미 국채 시장 정상화 약속과 실제 매입의 합작
2020-03의 본질 — 시장 인프라의 한계
Fed가 본원통화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미 국채 시장의 호가창이 채워지지 않았다 — 그 사이의 파이프(딜러 대차대조표)가 SLR(보완레버리지비율) 규제와 위험회피로 막혀 있었기 때문. 결국 Fed는 SLR을 한시 면제하고, 동시에 본인이 직접 채권을 매입했다. 본원통화 ≠ 시장 유동성의 가장 선명한 실험 데이터.

7.3 2019년 9월 레포 발작 (보조 사례)

2008·2020만큼 큰 사건은 아니지만 메커니즘이 깔끔한 예시. 2019년 9월 17일, 평시 2% 부근이던 미국 overnight 레포금리가 한 거래일에 10%까지 급등했다.

이 사건은 본원통화의 절대량이 아니라 분포·시기·규제 한도가 유동성의 핵심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자세한 메커니즘은 초단기 자금시장에서.

8. 유동성과 가격 — 유동성 프리미엄

8.1 유동성 프리미엄의 정의

정의
같은 펀더멘털을 가진 두 자산이라도, 시장에서 더 잘 거래되는 쪽이 더 비싸다(=수익률이 더 낮다). 그 가격 차이를 유동성 프리미엄이라 부른다. "프리미엄을 지불하고서라도 유동성을 가지려는 합리적 행동"의 시장 균형.
$$r_{\text{유동성 낮음}} - r_{\text{유동성 높음}} = \text{유동성 프리미엄 (스프레드)}$$

유동성 프리미엄은 평시에도 항상 양(+)이지만 작다. 위기 때 폭증하며, 폭증의 크기 자체가 위기의 강도를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8.2 On-the-run vs Off-the-run 스프레드

유동성 프리미엄을 가장 깔끔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미 국채의 on-the-run vs off-the-run 스프레드다.

두 채권의 발행자(미 재무부)와 신용 위험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런데도 평시 두 수익률 사이에는 약 5~15bp의 일정한 스프레드가 있고, 이 스프레드가 시장 유동성의 한 측정치로 학계·실무에서 표준이다.

예시 — 1998년 LTCM과 유동성 프리미엄
Long-Term Capital Management(LTCM)는 "on-the-run / off-the-run 스프레드는 결국 좁아진다"는 거래를 대규모로 했다 — 평시 가정에서는 합리적이다. 그러나 1998년 러시아 디폴트 직후 시장이 일제히 안전자산(=on-the-run)으로 몰리며 스프레드가 오히려 더 벌어졌고, 레버리지 36배였던 LTCM은 한 달 만에 파산 직전까지 갔다. 유동성 프리미엄을 거래하는 것은 평시 수익 / 위기 손실의 매우 비대칭적 노출이다.
유동성 프리미엄이 의미하는 두 가지
  • ① 시장 가격은 펀더멘털 + 유동성의 함수다. "같은 자산"이라도 거래 환경이 다르면 가격이 다르다.
  • ② 유동성은 시간변동성이 크다. 평시의 작은 프리미엄이 위기에 10배로 벌어진다 — 이는 평시 가격에 사실상 "위기 옵션"이 끼어 있다는 뜻.

가치동역학 페이지에서 유동성 프리미엄이 가격 결정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종합적으로 본다.

9. 정리

핵심 명제 다섯 가지

  1. "유동성"이라는 단어 안에는 세 가지 다른 개념이 있다 — 자산·시장·자금조달. 평시에는 같이 움직여 한 단어로 묶어도 무방하지만, 위기에는 분리해서 봐야 메커니즘이 보인다.
  2. 중앙은행 유동성(M0)과 시장 유동성은 같지 않다. 본원통화를 늘려도 그 사이의 파이프(딜러·시장 인프라·규제)가 막혀 있으면 시장은 마른다. 2020-03이 가장 선명한 실험 데이터.
  3. 유동성 위기는 세 개의 양성 피드백 고리다 — 자산 가치 ↓ → 담보 부족 → 자금조달 막힘 → 강제 매도 → 자산 가치 ↓. 한 곳을 끊어야 멈춘다.
  4. 2008년과 2020년은 위기의 진입로가 달랐다. 전자는 신용·자금조달, 후자는 갑작스러운 일제 현금 선호. 도구도 달랐다 — 전자는 LOLR과 LCR·NSFR 규제 도입, 후자는 직접 시장 매입과 SLR 한시 면제.
  5. 가격에는 항상 유동성 프리미엄이 끼어 있다. 같은 펀더멘털도 거래 환경이 다르면 다른 가격을 받는다. 그 프리미엄의 시간변동성이 유동성 리스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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